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좌의 난 (문단 편집) == 배경 및 반란 계획 == [[경종(조선)|경종]] 사후 세제(연잉군)가 [[영조]]로 즉위했을 때, 집권한 [[노론]]의 서슬에 밀려 [[소론]]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. 이에 밀려난 소론 세력들은 경종의 의문사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고, [[경종 독살설|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인식]]이 차츰 확산되었다. 그리고 결국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조정을 엎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. 이때 [[정미환국]]이 터지고 [[이광좌]]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들어서서 그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다. 소론들은 당황했으나,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계속 반란을 추진하니 이 사건이 바로 영조 4년(1728)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. 그들의 계획은 '삼남 지방인 [[충청도]], [[전라도]], [[경상도]]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 내의 동조세력이 호응한다', '경기군이 [[한양]]을 공격하는 동안 호남, 영남군이 북상하여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도성을 점령한다'는 것. 왕위에는 [[소현세자]]의 자손인 [[밀풍군]] 이탄을 앉히기로 했다. 대원수로 추대된 이인좌는 [[세종대왕]]의 4남 [[임영대군]]의 9대손이자 [[윤휴]]의 손녀사위로, [[남인]] 명가의 출신이지만 관료사회에 진출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. 반란군에서 경기 지역의 군사를 맡았다. 사실 이인좌가 순전히 모든 반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[[청주시|청주]]를 함락시키고 곧장 [[경기도]]로 진군하는 등 경기 지역에서 크게 항쟁했기 때문에 반란에는 이인좌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. 영남의 군대는 사족인 정희량(鄭希亮)[* [[초계 정씨]]로, [[남한산성]] 항전 당시 [[청음 김상헌]]과 더불어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할복한 이조참판 정온(鄭蘊)의 현손(玄孫)이다.], 호남의 군대는 태인현감 박필현(朴弼顯)이 맡았다. 군사는 돈을 주고 산 [[용병]]과 점령지의 관군을 회유하여 구성되었다. 원래 [[평안도]]에서 평안도 [[관찰사]]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고 [[서울특별시|도성]]에서 총융사 김중기, 포도대장 남태징이 내응하기로 했지만 이광좌가 재빨리 이사성, 남태징을 체포하여 [[평안도]]와 도성 일대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. 그럴만한 게, 소론 완론들은 반란을 진압하여야 자신들이 역모와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 살아남을 수 있었다. 낌새를 눈치채자 소론의 원로였던 전 좌의정 최규서가 급히 상경하여 영조에게 이인좌의 역모를 고변하였고, 이어 이광좌가 한양 내 역당의 무리가 반란군과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였다. 소론 완론이었던 [[오명항]]과 [[조현명]], [[박문수]] 등도 직접 출군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ua_10403026_009|1728년 3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된 이인좌가 직접 밝힌 반란의 계획. 영조실록 16권,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9번째 기사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